
한국 재난 영화라고 하면 으레 중반부 즈음에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 나오고, 주요 인물 한둘이 희생되는 공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 공식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극장에서 재난 영화를 고를 때마다 괜히 마음의 준비부터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2019년 개봉한 <엑시트>는 처음부터 그 공식을 완전히 무시하더군요. 보고 나서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기분 좋게 극장을 나왔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SOS 신호와 귀에 박히는 음악, 직접 들어보니
일반적으로 재난 영화의 OST는 웅장하고 묵직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엑시트>는 그 공식을 상당 부분 벗어납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이건 예상 밖이다" 싶었던 순간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주인공 용남과 의주가 구조 헬기를 향해 모스 부호 기반의 리드미컬한 SOS 신호를 외치는 장면인데, 거기에 맞물리는 비트가 긴박하면서도 귀에 착착 감기는 중독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모스 부호(Morse code)란 점과 선의 조합으로 문자를 표현하는 통신 방식으로, SOS는 단음 세 개·장음 세 개·단음 세 개의 배열로 이루어져 국제 조난 신호로 사용됩니다. 영화는 이 신호를 직관적인 리듬으로 변환해 극 중에 녹여냈고, 덕분에 긴박함과 유머가 동시에 느껴지는 독특한 장면이 탄생했습니다.
극장을 나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OST의 중독성은 단순히 제 개인적인 감상만이 아니었는지, 영화는 최종 관객 수 942만 명을 기록하며 그해 여름 흥행을 이끌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음악의 여운이 남아 관람 만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클라이밍 액션이 단순 볼거리가 아닌 이유
클라이밍 액션이라고 하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어마어마한 CG와 대규모 세트가 먼저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엑시트>의 클라이밍 시퀀스는 방향이 달랐습니다. 헬스장 간판, 학원 건물 외벽, 고깃집 네온사인 같은 도심의 지극히 평범한 사물들을 홀드(Hold) 삼아 기어오르는 방식인데, 홀드란 클라이밍에서 손이나 발로 잡고 딛는 돌출된 지점을 의미합니다. 이 친숙한 배경 덕분에 '저 건물 나도 지나쳐 봤는데' 하는 공감대가 생기면서 긴장감이 배가됐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인상 깊었던 건 다이노(Dyno) 기술이 나오는 장면이었습니다. 다이노란 클라이밍에서 홀드 간 거리가 멀어 두 손, 두 발이 동시에 벽에서 떨어지는 순간적인 도약 기술을 말합니다. 용남이 난간을 향해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그 순간, 극장 안 공기가 달라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아무 안전장비도 없이 로프 하나에 의지해 건물 외벽에 매달린 상황에서 이 기술을 구사하는 장면은, 화면 구성과 카메라 앵글이 섬세하게 맞물려 몸을 앞으로 기울이게 만드는 몰입감을 줬습니다.
영화 연출 측면에서도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뷰포인트 쇼트(Viewpoint Shot)란 인물의 시선 방향에서 화면을 잡아 관객이 인물과 같은 위치에 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 촬영 기법인데, <엑시트>는 이 방식을 외벽 등반 장면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해 고도감과 공포감을 극대화했습니다. 덕분에 액션 자체가 단순한 시각적 볼거리를 넘어서 관객을 직접 끌어당기는 체험적 긴장감으로 작동했다는 게 제 경험상의 판단입니다.
<엑시트>에서 클라이밍 장면의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일상적인 도심 구조물을 클라이밍 홀드로 활용해 공감대와 현실감을 높였습니다.
- 다이노 기술 등 실제 클라이밍 전문 동작을 극의 결정적 순간에 배치해 극적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 뷰포인트 쇼트를 활용한 촬영 기법으로 관객의 몰입도를 끌어올렸습니다.
- 방독면, 쓰레기봉투 방호복 등 일상 소품의 창의적 활용이 생존 서사에 현실적 맥락을 더했습니다.
청년 재난이라는 진짜 주제, 얼마나 유효한가
<엑시트>를 단순히 유쾌한 재난 오락 영화로만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보는 내내 주인공 용남의 처지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대학 시절 산악부 에이스였지만 졸업 이후 수년간 취업에 실패하고 백수로 지내는 청년. 그 설정이 단순한 코미디 소재로 쓰이면서도, 동시에 영화 전체의 서사를 떠받치는 은유로 기능한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청년 실업 문제는 영화가 나온 2019년 당시에도 심각한 사회 현안이었습니다. 실제로 2019년 청년(15~29세) 실업률은 8.9%로 집계되어 전체 실업률의 두 배를 웃돌았으며, 취업 준비 인구까지 포함한 체감 실업률은 이보다 훨씬 높았습니다(출처: 통계청). 영화는 이 맥락을 배경에 깔고, "사회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것들이 정작 생명을 구한다"는 메시지를 재난 상황을 통해 전달합니다. 취미로 배운 클라이밍이 실전 생존 기술이 되는 역설적인 플롯이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사회적 발언으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물론 솔직히 말하면, 후반부 구조 기회를 자발적으로 양보하는 서사는 조금 예측 가능하게 흘러가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영웅적 희생의 공식을 완전히 비틀지는 못했다는 아쉬움이 살짝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주요 인물도 죽이지 않고 영화 내내 생존의 역동성에만 집중하는 연출 방침은, 기존 한국 재난 영화의 신파적 문법을 거부한 용기 있는 선택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무거운 현실 이야기를 이렇게 경쾌하게 풀어낼 수 있다는 걸 <엑시트>가 증명해 줬다고 생각합니다.
어둡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지쳐 있을 때 <엑시트>같은 영화 한 편이 얼마나 큰 정화 효과를 주는지는, 직접 보고 나서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재난의 긴박함과 유쾌한 웃음, 청년 세대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한 편에 담아낸 이런 작품이 앞으로도 꾸준히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주말 저녁에 가볍게 틀어두기 딱 좋은 선택입니다.